[2024년 국내 힙합 결산] 한국 힙합, 도약을 위한 내실 다지기
에디션m
'이런 노래를 뭐라고 하지?'
'이 노래는 어떻게 유행하게 됐을까?'
우린 종종 음악을 들으며 장르, 아티스트, 혹은 노래의 이면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궁금해하죠. 또는 최애곡과 비슷한 노래, 최애 밴드와 비슷한 가수에 목말라하기도 하고요. 하나의 음악을 접하면 다섯 가지의 질문을 하게 되는 독창적 탐구형 리스너를 위해, 멜론과 전문가가 힘을 모아 대중음악 지침서를 발행합니다. 세상의 모든 음악을 에디션m에서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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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힙합, 도약을 위한 내실 다지기
2년 전, 힙합은 탄생 50주년을 맞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은 축제 분위기와 정반대였다. 빌보드 측은 상반기 동안 차트 정상을 차지한 힙합 앨범과 싱글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자료를 공개하며 '힙합 위기론'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폈고, 롤링스톤 지를 비롯한 많은 매체들도 '힙합의 지배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내용의 분석 기사를 게재하며 의혹에 박차를 가했다. 비슷한 시기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시청률이나 화제성 면에서 차츰 하락세를 보이던 장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가 비공식적인 종영을 알리며 더 이상 신규 시리즈를 이어 나가지 않는 상황이 됐다. 실제로 챌린지를 강조했던 방송용 음원 지코의 '새삥'이나 다이나믹 듀오의 'Smoke'를 제외하면 음원 차트에서 흥행한 힙합곡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힙합은 정말 위기에 봉착했을까. 표면적으로는 뚜렷한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2024년은 오히려 쇼 프로그램으로 드리워진 거품을 걷어내고 10년간 확보한 지지층을 지지대 삼아 천천히 내실을 다져 나간 시기에 가깝다. 먼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다양한 앨범 단위의 작업물들이 수놓아지며 스펙트럼을 넓혔다. 많은 수의 신예가 등장했으며 이 못지않게 베테랑들의 복귀 소식도 울려 퍼졌다. 비록 대표 경연 프로그램이었던 '쇼미더머니'는 활동을 멈췄지만, 보다 원초적인 랩 퍼포먼스에 집중해 장르 마니아들의 갈증을 해소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랩:퍼블릭'이 등장하는 등 '쇼미' 공백에 대한 대책도 하나둘 등장했다.
올해 해외 팝 시장을 가장 크게 뒤흔든 이슈는 '드레이크(Drake)'와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의 디스전이었다. 각 상업성과 예술성을 대표하는 두 양대 주자가 벌인 이 싸움은 장르 팬이 아니어도 관심을 가질 만큼 높은 화제성을 자랑했고, 실질적인 상업적 성과로도 이어지면서 힙합을 다시 주류로 가져온 대사건이 됐다. 동시에 한국에서도 거대한 디스전 하나가 펼쳐졌다. 개그 유튜브 채널 '뷰티풀너드'에서 만든 부캐 '맨스티어'가 그 주인공으로, 힙합의 과시적인 면을 부각한 래퍼 캐릭터와 이들의 페이크 다큐 형식을 통해 시청자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이 발매한 싱글 'AK47'의 뮤직비디오는 조회수 천만 회를 뛰어넘었다.

래퍼들은 아무리 풍자라 해도 선입견을 부추기고 문화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모습을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피에이치원(ph-1)을 필두로 디스전이 시작됐고 코르 캐시(KOR KASH) 등 여러 래퍼가 전투에 동참하면서 그 열기가 더해졌다. 참전하는 래퍼들과 지켜보는 관객들의 수가 늘자 수위도 덩달아 세지면서 자극적인 양상을 띠기도 했지만, '촛불'을 발표한 스카이민혁처럼 침착하게 그간 모습을 성찰하고 앞으로 한국 힙합이 더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자는 진영도 등장하면서 서로에 대한 갈등이 조금씩 누그러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비교적 잠잠했던 한국 힙합 신에 큰 파동을 가져오고 다양한 담론을 활성화한 계기가 됐다.

'힙합은 여전히 멋있다'는 주장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에 힘을 실어주듯 개성 뚜렷한 앨범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이센스의 [저금통] 프로듀싱을 담당한 허키 시바세키(Hukky Shibaseki)와 래퍼 비프리가 의기투합해 만든 프로젝트 [Free Hukky Shibaseki & the God Sun Symphony Group : Odyssey.1]은 로파이(lo-fi)한 질감에 힙합 신에서 보기 힘든 일상적인 소재와 프리스타일에 가까운 비정형의 노랫말을 입혀 독창적인 음악적 세계를 풀어냈다.

래퍼 이쿄(IKYO)와 프로듀서 오투(The O2)로 이뤄진 그룹 오코예(O'KOYE)의 [Whether The Weather Changes Or Not]은 재즈 힙합이라는 테마 아래 풍성한 구성과 정신없이 몰아치는 세션 연주를 내세운 비트메이킹으로 신선한 사운드를 갈구하던 이들의 갈증을 단숨에 해소했다. 탄탄한 랩 테크닉과 높은 완성도로 이름을 알리던 래퍼 콰이(KWAII)의 정규작 [DISTORTED]는 전보다 더 커진 규모와 꽉 찬 밀도로 환영을 받았고, 전 트랙 작사, 작곡, 편곡을 홀로 도맡은 15세 뮤지션 율음의 [CICADA]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퀄리티를 통해 스스로 힙합 신의 미래, 넥스트 제너레이션임을 당당히 증명했다. 가상 세계와 게임이라는 콘셉트 아래 복합적 요소를 고루 담아 즐길 거리를 배가한 쿤디판다의 [MODM 2 : The Bento Knight]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작품이다.

힙합 신을 오래 지탱해온 전통 레이블 하이라이트(Hi-Lite), VMC, 일리네어 등이 줄줄이 해산을 알렸지만 동시에 트렌드를 빠르게 포착하고 자기만의 진영을 구축한 이들이 생겨나면서 또 다른 지형도가 그려졌다. 눈부신 성장세를 보인 플리키 뱅(Fleeky Bang), 트레이비(Tray B), 폴로다레드(Polodared)가 속한 '더리 플레이 레코즈(DIRTY PLAY RECORDS)'는 그중 하나로, 이들은 2020년대 들어 새로 생겨난 신생 장르 드릴(drill)과 틱톡 챌린지 문화를 적극 흡수한 결과물로 올해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높은 장르 이해도로 리스너들의 지지를 얻은 랍온어비트(lobonabeat!), 빌스택스, 오이글리(oygli) 중심의 크루 '스꺼러갱(SKRR GANG)'은 컴필레이션 앨범 [Skreet Knowledge]를 통해 보다 발전된 고도의 트랩 음악을 선보였다. 식케이(Sik-K)와 김하온으로 이뤄진 '케이씨(KC)'는 신식 사운드인 레이지(Rage) 장르를 도입한 'KC Tape' 시리즈를 연달아 발표하며 한국 힙합의 미래를 현재진행형으로 제시 중이다.

굵직한 커리어를 가진 여러 베테랑들이 돌아와 국내 힙합의 찬란했던 과거를 호출했다. 'Smoke'의 흥행으로 또 한 번 전성기를 갱신한 다이나믹 듀오는 [2 Kids On The Block]을 발매하며 정규 10집이라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세웠고, The Quiett은 아무런 홍보 없이 기습으로 정규 6집 [Luxury Flow]를 발매하며 관록의 프로듀싱을 내세웠다. 허클베리 피는 [READMISSION]으로 올드스쿨 사운드로 가득 채운 정통 힙합을 선보였다. 특히 가리온의 귀환은 올드 팬들의 심금을 울렸는데, 정규 3집 [가리온 3]을 통해 과거와 현재까지 힙합 역사를 고루 살펴볼 수 있는 피처링진과 클래식에 가까운 붐뱁 사운드를 가져와 대부의 명색과 입지를 증명했다.

무엇보다 2024년은 방송에 모습을 비춘 실력자 래퍼들이 저마다 분기점이 될 앨범을 가져온 해였다. 자기 내면 깊숙한 생각을 끄집어낸 이케이(EK)의 [ESCAPE]는 대표작을 갱신했다는 평을 받았고, 분노와 자기붕괴라는 주제로 한 큐엠(QM)의 [개미]는 누구보다 몰입감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간 이미지와 다르게 진솔한 스토리텔링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낸 제네 더 질라의 [94-24]도 빼놓을 수 없다. 문화 교류의 한 축을 담당하던 '쇼미더머니'의 공백이 가져올 영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테지만, 한국 힙합은 분명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음악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준수한 퀄리티의 앨범들이 나타나며 신을 더 풍성하게 가꿨고, 어느덧 '증명'의 의미는 티비 프로그램에서 멋진 무대를 보이는 것보다 얼마나 훌륭한 작업물을 내는지로 바뀌었다. 지금은 단기간의 가시적인 성과보다도 멀리 걸어가기 위한 기반을 다질 시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