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틈 없이 달려온 크라잉넛 (CRYING NUT)의 30년
쉴 틈 없이 달려온 크라잉넛 (CRYING NUT)의 30년
1995년 8월, 신생 밴드 크라잉넛 (CRYING NUT)이 홍대 클럽 드럭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습니다. 내일 없이 오늘만 살 것 같았던 밴드는 어느덧 인디 신의 최장수 밴드가 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쉴 틈 없이 달리고 있습니다.
밴드의 30주년을 기념하며, 이들은 올 여름 클럽 곳곳에서 'NUT 30'이라는 이름의 공연으로 팬들을 만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달 말부터는 김창완밴드, 잔나비, 장기하, 김수철과 함께하는 합동 공연 '너트30 페스티벌'을 준비 중이며, 밴드의 단독 콘서트는 물론 기획 전시 '말달리자'까지 계획하며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지요.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시간 동안 크라잉넛이 달려온 길에는 어떤 풍경이 있었을까요? 오늘은 다섯 땅콩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봅니다.
인디펜던트(independent), 그리고 이의 준말 인디(indie). '독립적인'이라는 사전적인 뜻도 있지만, 예술계에서는 기존의 시스템을 거부하고 제작부터 유통까지 모든 과정을 아티스트가 직접 담당한다는 창작 개념으로 널리 쓰이는 말입니다.
한국에서 이 인디 문화는 1990년대 중반 홍대를 중심으로 시작됐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렴한 임대료에, 미술대학 중심의 예술 생태계를 가진 지역적 분위기가 음악에까지 확장되어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만나고 교류하는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홍대에서 개화한 인디 문화, 크라잉넛은 그 중심에 있던 밴드였습니다. 이들이 그런지 록을 지향했던 밴드 Yellow Kitchen과 합작으로 냈던 앨범 [Our Nation Vol.1]은 초창기 인디 신의 무드를 그대로 담고 있는데요. 크라잉넛의 대표곡인 '말 달리자'의 초기 버전이 바로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조악한 음질이 특징적이기도 하지만, 젊음의 날 것 가득한 에너지만큼은 200% 순도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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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자세히보기말 달리자 크라잉넛 (CRYING NUT)
1998년은 (흔히 IMF 사태라고 부르는) 외환 위기의 한복판이었습니다. 혼란한 시기에 나온 이들의 1집은 대한민국 인디 음악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자, 경제적 사회적 고통에 신음하던 당대 청춘들의 해방구이기도 했습니다.
'꺼져라 껍데기 집어쳐라 거짓말'이라는 선언적 가사로 시작한 첫 트랙 '묘비명'부터 이들이 지향하던 태도가 그대로 담겨 있는데요. 1970년대 원류 펑크의 자기파괴적인 태도가 아닌, 세상에 욕을 날리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낙천적인 태도를 유지했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한국식 펑크록의 초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펑크 일변도로 직진하던 1집에 비해, 2집에서는 집시풍 멜로디를 활용하고 왈츠 리듬을 결합하는 등 음악적으로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본작은 '서커스 매직 유랑단'과 '신기한 노래'를 필두로 독보적인 분위기의 음악들을 수록하며 1집에 이어 명반의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여전히 잘 달리던 크라잉넛이지만, 여전히 이들은 홍대 문화 안에서의 인기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분위기는 3집 [하수연가 (下水戀歌)]부터 완전히 바뀝니다. 지금 시대에도 심심찮게 울려 퍼지는 공전의 히트곡, '밤이 깊었네'가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거칠고 악동 같은 이미지가 강했던 크라잉넛은 '밤이 깊었네'를 통해 보다 많은 대중과 접점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곡은 전국적으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이후 크라잉넛에게는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던) '낭만'이라는 키워드가 따라붙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이 앨범부터 정식 멤버로 합류한 멤버, 김인수가 만든 '지독한 노래'는 가사 한 줄 한 줄마다 세태에 대한 온갖 풍자가 들어있는데요. 영화 '신라의 달밤'에도 순화된 버전이 수록되며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앨범명인 [하수연가 (下水戀歌)]는 '하수구의 사랑 노래' 또는 '더러운 세상 속의 연가'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나도 잘 지은 앨범명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2002년을 돌이켰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전국민을 열광하게 했던 한일월드컵일 겁니다. 크라잉넛도 당시 '오 필승 코리아'를 공개하며 큰 인기를 누린 바 있습니다. 이 곡은 이후 '필살 Offside'라는 곡으로 편곡되어 4집 [고물라디오]에 수록됐습니다.
동명의 노래가 담긴 과거지향적 앨범 [고물라디오]를 발매하고, 이미 군필자였던 김인수를 제외한 멤버들은 군악대로 동반 입대하며 밴드는 잠시 동안의 공백기를 갖게 됩니다. [고물라디오]는 팬들에게 바치는 잠시 동안의 이별 선물이었습니다.
한편 전역 후 작업해 발표한 [OK 목장의 젖소]는 밴드의 멜로디감각이 가장 빛을 발했던 시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본작에서 '룩셈부르크', '명동콜링', '마시자', '뜨거운 안녕' 등 명곡들의 향연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언급되는 대표곡들을 열거했지만, 무려 심수봉과 고전적 무드를 만들어낸 '물밑의 속삭임 (Feat. 심수봉)', 그리고 저마다 서정적인 매력과 사연들을 간직한 '새', '순이 우주로', '튼튼이의 모험' 등 다른 트랙들도 팬들 사이에서 많은 애청을 받았습니다.
[OK 목장의 젖소]를 이전의 앨범들과 연달아 들어보면, ('부딪쳐'와 '마시자'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전보다 힘들이지 않은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선율 중심의 노래들을 만들었다는 것인 느껴지는데요. 대한민국 남자들이 으레 전역 후 급격한 정신적인 성숙을 겪는 것처럼, 그들의 음악세계 또한 성숙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불편한 파티]는 크라잉넛 특유의 왁자지껄한 에너지를 더욱 중폭시킨 앨범이었습니다. '불편한 파티', '만취천국', '비둘기', '귀신은 뭐하나' 등 에너제틱한 트랙들이 특히 돋보였는데요. 유머러스한 곡들이 많아 '철들지 않는 어른'의 매력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준 앨범이 아니었나 합니다.
역대 히트곡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는 인상이 있지만, 타이틀 '착한아이'는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대조하면서 선악구도는 모호하게 뒤틀어버린 명곡이었습니다. '루나'와 'Gold Rush'에서는 낭만적 가사와 비장한 매력으로 색다른 매력을 더하기도 했습니다.
각각 2013년과 2018년에 나온 [FLAMING NUTS]와 [리모델링 (REMODELING)]은 현시점 이들의 후반기 커리어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연주에 있어 시끌벅적한 에너지는 그대로이지만, 보다 너른 장르를 포용하고 긍정의 메시지를 설파하며 한층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물론, 그 본질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크라잉넛 그대로였고요.
여기서는 어쩔 수 없이 8집 [리모델링 (REMODELING)]의 공식 앨범 소개글의 일부를 빌려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들의 당시 모습, 그리고 지금의 크라잉넛까지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변해가는 것,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완벽하게 한결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늘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는 것. 매번 '형들 너무 그대로 아니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철은 천천히 조금씩만 드는 것, 쉽게 지치지 않는 것, 토요일 밤에는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인 양 한잔하는 것, 하고 싶은 음악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크라잉넛이 지금까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30년의 시간 동안 크라잉넛은 한결같았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무대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나타나 공연으로 팬들을 만나고 있고, '캡틴락' 한경록은 여전히 자신의 생일마다 경록절을 개최하며 홍대 인디 문화를 열정적으로 전파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은 전과 같지 않습니다. 밴드가 주인공인 클럽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고, 언제나 시끄러울 것 같던 홍대에도 공실이 넘쳐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크라잉넛은 오늘도 달립니다. 지난 날을 추억하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끈끈한 정을 나누고, 즐겁게 맥주잔을 부딪히고, 클럽이 다 문을 닫아도 전국 방방곡곡 무대에 오르며 목청껏 노래합니다. 3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크라잉넛은 언제나 크라잉넛이었습니다.
아마 앞으로의 시간도 다르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지금의 모습처럼, 30주년을 넘어 40주년, 50주년까지도 변치 않는, 철들지 않는 어른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음악에, 문화에, 또 동료들에 언제나 마음을 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 그 누구보다 철 든 어른들일 테지만요. 크라잉넛의 30주년, 그리고 한국 인디의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